시간의 강을 건너는 적요의 풍경 / 정미경
폭설이 쏟아져 내리던 2022년 1월. 어머니는 먼 길을 떠나셨다. 늘 그 자리에 서 계셨을 것 같은 어머니는 이제 여기에 안 계신다. 나는 멈춰진 시간 속에 서 있는 듯 하다. 시간은 정지되었고 이 곳을 떠나기 전 마지막 모습만이 기억 속에 생생하다.
어머니의 부재 후, 삶과 죽에 대한 질문과 의문으로 많은 날들이 흘러갔다. 생명은 순환되며 소멸은 생성으로 순환된다는 것을 알게 될 즈음, 소멸을 나의 화법으로 이야기 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소멸을 표현하기 위한 소재는 어머니의 투병생활 중 함께 한 추억의 장소와 어머니의 공간에서 사용했던 물건들에서 찾았다. 탄천의 강아지풀, 쑥, 양파, 파, 달맞이꽃, 엉겅퀴, 작은 씨앗이 맺혀 있는 들풀들을 집으로 가져 와서 말리고 채색 하였다. 텃밭에서 채집한 식물의 구근과 과실나무에서 낙과한 과실들은 자연이 순환되는 것을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어서 소멸을 말하기에 좋았다. 스키모토의 디오라마를 빌은 박제새는 어머니와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놓치기 싫은 간절한 바램에서 가져 왔다. 테이블의 경계와 느린 셔터, 사물을 얼리고 녹이는 과정, 바람의 흔적을 통하여 헛된 욕망이라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 넓은 화각을 구성하기 위하여 카메라의 높낮이의 변화를 주었고 테이블의 측면과 정면을 이용하여 다양한 화면구성을 하였다. 작품에서의 여백은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닌 생각의 여지를 주는 공간으로 고요함과 쓸쓸함을 표현하면서 푼크툼적인 요소를 들여 왔다.
촬영은 실내와 로케이션 촬영을 병행하였다. 실외의 촬영에서는 태고적 기운이 감도는 장소를 선택하였고 인공광과 자연광을 동시에 사용하여 피사체의 윤곽을 부드럽게 표현하고자 하였다. 소멸의 배경이 되는 색은 주조색인 화이트와 블랙, 보조색으로 노랑과 빨강을 가져 왔다. 이 모든 요소들을 하나로 연결하여 생성과 소멸의 경계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소멸은 어머니에게만 일어나는 한정적인 것이 아닌 지금의 나, 공간, 우주에서 매 순간 이루어지고 다시 생성되어 순환된다는 것을 작업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고 슬픔을 이겨 낼 힘이 되었다.
소멸은 삶의 덧없음과 아득한 어둠의 세계로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성을 위하여 나를 버리는 과정으로 해질 무렵의 노을처럼 아름답게 빛났다가 고귀하게 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게 일어나는 소멸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잔잔한 물에 비치는 달빛을 보듯 고요히 응시한다. 나의 사진을 보는 이들도, 아픔을 겪은 이들도, 앞으로 겪을 이들도 소멸을 대하는 자세가 그러하기를 바라며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시간의 강을 건너는 적요의 풍경 / 정미경의 사진
서길헌(미술비평, 조형예술학박사)
새 한 마리가 눈 덮인 침엽수림의 한 나무에 앉아 있다. 새는 고목 한 그루 밖에 서 있지 않은 황량한 성터의 돌 위와, 사막의 둔덕 위 나무 그루터기와 바람만이 지나가는 듯한 모래벌판에도 오도카니 앉아 있다. 그리고 병이나 작은 항아리나 접시 등의 기물과 함께 그릇에 담기거나 간혹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얼거나 썩어가는 과일들, 구근들, 떨기나무 열매들, 꽃대가 꺾인 채 놓인 말라가는 꽃들이나 풀이나 곡식의 이삭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적막한 공간에도 새는 어김없이 앉아 있다. 더러 기물은 테이블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기도 하다. 어딘가 불안하고 텅 비어있는 공간을 가르고 문득 날카로운 새의 소리가 지나가는 것 같다. 아주 짧게 울린 듯한 소리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기나긴 공명으로 남는다. 그러나 새는 아무 표정도 없다. 어딘가를 바라보지만, 그 어느 곳도 바라보지 않는 적막한 눈빛의 새는 마치 저승에서 날아온 새인 듯하다. 새가 무심하거나 골똘히 바라보는 듯한 모든 생물은 한때의 생기를 잃고 시들어가며 부패하고 소멸을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소멸은 끝이 아니다. 삶은 필멸에 이르고, 유한한 듯하지만, 오히려 끝에 이르러 몸을 바꾸어 다시 시작한다. 소멸은 소멸을 통해 다음을 잉태한다. 그것이 씨앗이다. 씨앗은 연속성이다. 이러한 각성은 작가 정미경의 마음에 투영된 어머니에 대한 애도로부터 온다. 어머니와의 영원한 이별을 계기로 삶의 연속성에 대한 통찰을 드러내는 정미경의 사진은 삶과 죽음, 소멸과 재생의 순환을 극적으로 포착하여 필멸과 새로운 시작의 관계를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그녀의 사진은 죽음을 단순한 끝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새의 무표정한 눈빛 속에 담긴 세계의 공허함을 통해 저승에서 이승을 이어주는 듯한 연속성의 메시지로서 담아낸다. 새의 무시간적 시선이 불러일으키는 깊은 적요의 풍경은 시간의 강을 건너는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꽃들과 과일들은 한때의 화사하고 싱싱했던 생기가 시들면서 시간 속에서 서서히 해체되어 간다. 마르거나 썩어가는 단계를 지나면 그것들은 그 자체로 씨앗으로 화한다. 메마른 씨방으로 남은 모체를 터뜨리고 나와 어디론가 퍼져나갈 씨앗들은 미지의 땅에서 발아하여 이 모든 과정을 또다시 되풀이할 것이다. 그녀가 찍은 정물화 같은 사진 속의 생물들은 이러한 과정을 침묵으로 함축하고 있다. 그녀가 ‘붙잡아’ 두고자 하는 것은 사라져가는 시간이다. 붕괴하는 것들, 소멸하여 무로 돌아가는 생물들을 그녀의 사진은 영원한 현재로 박제한다.
사진 속의 새는 박제된 새이다. 작가는 이를 히로시 스키모토의 방식에서 빌어왔다. 박제는 속을 비우고 살아있는 모습의 겉모습만 보존한다. 그러므로 박제는 살아있는 시간을 붙잡는다. 그것은 사진의 핵심이기도 하다. 정미경은 이러한 사진의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새의 박제를 사용하였다. 박제된 새와 함께 부패의 도정에 있는 다른 생물들 또한 바로 한 순간에 멈춘 채 사진 속에 박제되어 있다. 사진의 핵심은 ‘있었던 사실’에 있다고 바르트는 말한다. 정미경의 사진은 부패해 가면서 거기에 ‘있었던’ 생물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눈앞의 것들이 소멸해 간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그녀의 사진은 찍힐 때의 시간에 멈춘 채 영원히 간직한다. 작가가 박제한 이러한 정물들은 동시에 어머니가 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 또한 침묵 속에 증언하고 있다. 그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사진 속의 소품으로 자리하는 각각의 생물들을 응시하는 그녀의 시선 속에 살아있다. 그것은 그녀의 시선으로 체화된 어머니의 또 다른 시간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시선은 어머니가 남겨준 씨앗으로 화한다.
한때 어머니는 이곳의 시간 속에 계셨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여기에 없다. 이러한 사실을 바르트는 문득 어머니의 어릴 적 사진 속에서 깨닫는다. 그리하여 어머니의 부재를 알리는 사진에 새삼 놀란다. 그녀의 사진 또한 상실의 시간과 기억을 함축하고 있다. 부패하는 구근들과 시들어 떨어져서 씨앗으로 되살아나는 생명의 주기적 순환을 통해 그녀는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감정적인 고통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포착하고 있다. 이것은 어머니를 떠나보낸 작가의 시선이 사진에 남기는 깊은 애도이다. 사라져가는 시간을 붙잡으려는 욕망은 사진이라는 매체에 담기고, 어머니의 부재는 사진 속에 씨앗으로 남겨진다. 그러한 의미는 노환 중인 어머니와 떨어지는 꽃을 겹쳐 놓은 이전의 사진에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이후 어머니의 부재를 통한 삶과 죽음의 경계는 소멸을 새로운 생성의 과정으로 바라보는 통찰의 시각을 담고 있는 박제된 새, 부패하는 식물, 오랜 시간이 녹아있는 낡은 물건 등을 통해 시간의 흐름과 소멸의 순환으로 지시된다. 이러한 사진은 정물화의 형식을 취하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작가의 시선으로 담기 위해 흰색, 검정, 빨강, 노랑 등의 색을 활용해 소멸의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은유적으로 전달하는 조용한 매개체의 공간